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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사소한 거절 당함의 아픔 (총선 출구조사 조사원)


지인의 소개로 국회의원 선거 방송사 출구조사 일을 하루 하게 됐다.
투표소 근처에서 투표하고 나온 사람들에게 어떤 후보/당에 투표했는지 직접 조사하는 일이다.
이 나이에 무슨 이런 알바냐 했지만, 나이가 제법 있는 분들도 일을 한다고 하고, 무엇보다 일이 재밌을 거 같아서 큰마음 먹고 해보았다.

일의 강도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 온종일 서 있는 거 빼고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다.
하지만 진짜 힘든 일은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다.
바로 거절당함에 대한 상처였다.
시민들에게 다가가 어떤 후보/당에 투표했는지 물어보면 체감상 30% 확률로 거절당한다.
내가 만약 조사받는 시민이었어도 아마 이 상황을 당황스러워했을 거 같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거는 비밀선거가 기본 원칙이고 한국에선 정치관을 알리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본다.
또 출구조사는 일부의 투표소에서 실행됐었기에 여전히  낯설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 선거를 최소 20번 이상 치렀지만, 한 번도 출구조사를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모르는 타인을 경계하는 문화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나 영업 사원에게 발을 잡혀 봤는지 기억해보면 답이 나온다.
결국 출구조사 조사원이 하는 일은 완전한 타인에게 비밀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다.
철저히 을의 입장에서 정중하게 물어보지만, 경계의 눈빛과 차가운 거절은 약간씩 마음에 상처를 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거절을 당한다.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부탁한 거절이 아니라면 보통 기분이 살짝 씁쓸하지만, 거절을 그리 민감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하지만 거절의 태도가 좋지 않을 때는 마음의 상처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시민들의 냉대한 눈빛과 거절 의사/무시에 기분이 상해지기도 했다.
고작 하루 일을 했기에 거절에 대한 굳은살은 생기지도 않았다.
거절을 당하는 아픔에, 나를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출구조사원으로 더 많은 통계를 만들고 싶단 공익적인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멘트도 조금씩 바꿔보고, 부담스럽지 않은 제스처도 생각해 보며 나를 지키는 데 애를 썼다.
한편으로 텔레마케터등 고객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환을 간접 체험하게 되는 경험도 됐다.
이렇게 내가 살아온 인생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루 해봤고, 여러 생각이 들었고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선거엔 출구 조사원 말고 개표원 같은 다른 특수한 일도 해보고 싶다.

사족1. 정치 신념이 강한 분은 오히려 먼저 다가오셔서 조사에 적극 참여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사족2. 20대 젊은 분들과 70대 이상의 노인 분들은 조사에 비적극적이었다.
체감상 40~50대 유권자가 가장 조사를 잘해 주셨다.